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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을 5시 반에 맞춰놨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 6시 반이 될 때까지 침낭 밖을 나올 수 없었다. 산 속의 밤 날씨는 정말 무섭다. 나는 점심 거리를 챙겨오지 않았기 때문에 반드시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침낭 밖으로 나왔다. 아침은 곤다르 슈퍼마켓에서 산 치킨 맛 라면. 맛은 없지만 꾸역꾸역 먹었다. 하나 더 남았는데 이걸 어떻게 또 먹나..

 

[여유롭게 아침을 즐기고 있는 트레커]

 

오늘은 상카베르(Sankaber) 캠프에서 출발해 기치(Geech) 캠프까지 4-5시간 정도 트레킹한 후, 휴식을 취했다가 일몰 시간에 맞춰 전망대에 올라 석양을 보고 오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 한다. 오늘은 어제보다 오르막 길이 많아서 조금은 힘들었다. 하지만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전망은 좋아지는 법! 어제보다 훨씬 더 멋진 경관을 감상할 수 있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멋있어진 풍경. 높은 곳에 올라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에티오피아는 안개만 없으면 더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안개가 아니라 스모그라고 생각하지만..

 

 

중간에 계곡이 있어 물이 깨끗해 보이지는 않지만 발을 담궜다. 선크림을 큰 가방에 넣어 노새(mule)한테 보내는 바람에 세수를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내일부터는 선크림도 들고 다녀야겠다. 계곡에서 점심을 먹었으나 나는 점심 거리를 가져온 것이 없어 어제 먹다 남은 과자 몇 조각으로 때웠다. 어차피 목적지인 기치 캠프까지 2시 정도면 도착할 것 같아서 굳이 점심을 챙겨먹지 않아도 됐다.

 

기치 캠프에 다다르기 전에 기치 마을(Geech village)에 도착했다. 가이드가 기치 마을에 가면 커피를 마실 수 있다고 하여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기치 마을에 도착하니 마을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려면 커피 세레모니를 봐야하고 그렇게 때문에 50비르를 요구했다. 3-6비르 내고 먹던 커피를 아무리 커피 세레모니까지 보여준다 하더라도 50비르를 주고 마실 순 없었다. 난 이번 여행에서 별로 예산 걱정없이 돈을 팍팍 쓰고 있지만 이건 아니였다. 결국 나와 호주인 2명은 커피를 마시지 않고 먼저 기치 캠프로 향했고, 이스라엘인 오르는 커피 세레모니가 보고싶다고 하여 기치 마을에 남아 커피를 마시고 왔다. 오르가 커피를 마시겠다고 하자 가이드도 놀라서 두 번이나 가격을 확인해 주었지만 말이다.. 오르가 기치 캠프로 왔을 때 어땠냐고 물어보니 굉장히 만족한 눈치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커피를 볶기 시작해서 세 번 내려주기까지 완전한 커피 세레모니였다. 나는 에티오피아에 온지 열흘이 지났지만 이미 볶아져 있는 커피를 데우는 반쪽짜리 커피 세레모니는 많이 봤어도, 완전한 커피 세레모니는 아직 보지 못했는데.. 언젠간 커피 세레모니를 볼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 에티오피아 여행은 아직 20일이나 남았으니깐!

 

[기치 마을이 보인다!]

 

[마을 입구에서는 트레커들을 상대로 기념품을 팔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나와있었다.]

 

오후 1시 반 정도에 기치 캠프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빨리 도착해서인지 아직 노새(mule)가 운반해 준 짐도 다 안풀어져 있고 텐트도 쳐지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오늘 태어나서 노새를 처음 봤다. 사실 노새라는 단어도 이번 여행을 하면서 처음 들었던 것 같다. 노새가 뭔지 너무 궁금해서 인터넷은 안되고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노새는 숫나귀와 암말의 잡종이라는 설명이 나왔다. 설명을 들으니 조금은 알 것 같지만 사실 다음에 노새가 지나가더라도 저게 나귀인지 말인지 노새인지 구분하지 못 할 것 같다.

 

[노(mule)와 뮬맨(mule man). 뮬맨을 한국말로 뭐라고 써야되는지..]

 

[오늘 하루도 무거운 짐을 나르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노새.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죄송합니다.]

 

[기치 캠프의 모습. 왼쪽에 담요를 덮고 쭈그려 앉아 계신 스카우트 아저씨..ㅠㅠ ]

 

북쪽을 보니 높은 고개가 보였다. 시간도 남는데 저기에나 올라가볼까?라고 생각했는데 가이드가 잠시 후에 석양을 보러 저기로 올라갈꺼라고 알려주었다. 안 알려주었으면 두 번 오르락 내리락 할 뻔…

 

텐트가 지어지자 텐트에 누워서 다리를 쭉 뻗고 쉬었다. 조금 눈을 부쳤다가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던 책을 마저 읽었다. 카트린 지타의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이번 여행에서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한 책인데, 좋은 말도 많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책의 내용과는 조금 달랐다. 그래도 내가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무엇을 버릴 수 있는지,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었다. 산에서 읽기 딱 좋은 책.

 

기치 캠프에서 쉬고 있는데 아이들이 마을에서 캠프까지 담요를 들고 왔다. 밤새 담요를 빌려주고 돈을 버는 듯 했다. 내 침낭은 슈퍼초울트라 좋은 침낭이어서 담요를 빌리지 않았지만 호주인 두 명과 이스라엘인은 담요를 빌렸다. 호주인은 데이비드와 벤치라는 친구였는데 벤치가 현재 탄자니아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데이비드가 에티오피아 여행 겸 아프리카로 왔다. 데이비드는 정치 분야의 저널리스트였는데 이번에 직장을 옮기면서 3주 정도 시간이 났다고 한다. 벤치는 좀 배려심 없고 자기 하고 싶은 데로 해야하는 그런 성격인 반면 데이비드는 사려깊고 친절했다. 데이비드가 내 허술한 영어를 많이 배려해 준 덕분에 나는 트레킹 하는 내내 데이비드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4일 동안 데이비드를 보면서 정말 친절하고 마음씨가 착하다는 걸 느꼈는데, 이 아이들이 왔을 때에도 정말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아이들도 금새 마음을 열었다. 데이비드 같은 남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도 안먹었고, 해가 질때는 석양을 보러 전망대에 올라가야하기 때문에 조금 이른 저녁을 먹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료는 쌀, 파스타 면, 라면, 참치, 케찹(파스타 토마토 소스를 달라고 했더니 케찹이었다) 뿐이다. 일단 밥을 만들던 파스타를 만들던 넣을 수 있는 재료가 참치밖에 없다. 내가 왜 이렇게 장을 봐왔는지 진심으로 후회가 되지만 이제와서 어쩌겠나. 어제 밥+참치를 먹었기 때문에 오늘은 참치 케찹 파스타라는 메뉴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정말 내가 만들었지만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맛이 없었다. 또 이른 저녁을 의식해서 양을 많이 만들어서, 다 먹는게 곤욕이었다. 참치 파스타를 다 먹기 위해 황금 같은 물 1L와 오렌지로 중간중간 입을 헹궈줘야 했다. 남은 끼니는 오로지 밥+참치를 먹기로 결정했다. 파스타 면은 라면을 끓일 때 추가 사리로 넣어야 겠다.

 

[배고픈 까마귀도 내 참치 케찹 파스타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5시 반이 되어 석양을 보러 전망대에 올라갔다. 전망대는 생각보다 높아서 오르는데 힘들었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니 장관이 펼쳐졌다. 북쪽으로는 펼쳐진 전경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졌고, 서쪽으로는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해가 넘어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왜 어린 왕자가 해가 넘어가는 것을 보기 위해 의자를 앞으로 당겼었는지 이해가 갔다. 나도 어린 왕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현실은 늙은 거지..

 

일몰과 매.. 난 이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꺼다.

 

아쉽지만 해가 졌다.ㅠㅠ 이곳 전망대 때문에 시미엔 산에 다시 오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가이드 없이 왔다면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을텐데 운좋게 마지막에 그룹에 참여하기로 의사결정을 바꾸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난 참 운이 좋은 것 같다.

 

초승달이 신기한 모양으로 떠 있어 한참을 바라봤다. 우리나라의 달은 옆에서부터 차기 시작한다면, 여기 에티오피아의 달은 밑에서부터 찬다. 당연하지 우리나라랑 위도가 다른데.

 

어느새 별들도 하늘을 메웠다. 한국에 있을 땐 별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는데, 수많은 별들을 보니 이걸 모두 관찰한 과학자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투어 회사에서 온 그룹은 캠프파이어를 했는데 나는 너무 저렴한 데를 골랐나 그런건 없었다.-_-; 그래도 캠프파이어를 바라만 보는 것 만으로도 좋았다. 석양도 좋고, 달도 좋고, 별도 좋고, 캠프파이어도 좋고. 그냥 여행을 떠나서 다 좋은가 보다. 행복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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