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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숨으로 이동하기 위해 아침 일찍 짐을 싸는데 내 슬리퍼가 없어진 걸 발견했다! 이럴수가.. 여행 다니면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게 처음이다. 아마 다나킬 투어 차량에서 떨어졌거나 어제 방 치우는 여자가 가져갔음이 틀림없다.(어제 치우고 있는 방에 내가 체크인을 하면서 내 가방을 먼저 방 안에 넣어두었다) 체크인하고 짐은 멀쩡한지 다시 한 번 확인했었어야 했는데, 다나킬 투어로 만사가 귀찮았던 나를 탓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대로 빈손으로 떠날 수는 없는 법. 에티오피아에의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는 항상 슬리퍼가 준비되어 있는데 일단 이걸 들고 리셉션으로 향했다. 체크아웃을 하면서 너네 청소 아줌마가 내 슬리퍼를 가져갔다고 우겼다. 아침 일찍이라 지배인은 없고 종업원들만 있어서 종업원들이 매우 귀찮아 하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열심히 우겨서 싸구려 슬리퍼라도 가져갈 수 있었다.(진상 코리안.. 죄송-_-;;) 어차피 같은 슬리퍼인데 좋고 나쁘고가 무슨 상관이랴.. 그렇게 호텔을 떠나려는데 호텔에서 다시 한 번 나를 불러 세웠다. 잠시 후 젊은 지배인이 나오더니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다시 한 번 상황 설명을 하니, 그럼 자기가 그 슬리퍼 값을 치루겠다고 한다. 뭐지? 이 에티오피아스럽지 않은 책임감은? 나는 가장 싼 방에 묵어서(150비르=약 9,000원) 아무리 중고로 친다 하더라도 내 슬리퍼 값이 내가 치룬 숙박비보다 몇 배는 더 비싸다. 숙박비보다 더 많은 돈을 받기엔 마음이 편치 않아 그냥 원래 가져가기로 했던 슬리퍼를 가져가는 걸로 합의를 봤다. 방도 깨끗하지 않고, 방에선 물도 안나오고, 슬리퍼도 잃어버렸지만, 기분 나쁘지 않게 메켈레를 떠날 수 있었다.(그렇다고해도 내가 묵었던 숙소를 적극 추천하진 않는다)

 

ETT의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차량을 타고 악숨으로 향했다. 여행사 차량은 새 차였고, 나와 산드라 부부 셋 만 타서인지 굉장히 편안하게 갈 수 있었다. 이제 여행을 막 시작했는데 편한 교통수단만 이용해서 큰일이다. 편한 것에 익숙해진 몸이 앞으로 남은 길고 고된 여행길을 버텨낼 수 있을지 조금이 걱정스러웠지만, 일단 지금은 편하니까. 이걸 즐기기로 했다.

 

처음으로 에티오피아의 대자연을 하늘이 아닌 땅에서 목격했다. 산드라 부부가 양보하여 내가 차의 앞자리에 앉은 덕분에 경관을 더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대부분 민둥산이어서 첫인상은 아름답진 않았지만, 독특한 모양의 산들이 참 매력적이었다.

 

악숨으로 가는 도중에 산드라 남편(이름 까먹음..)이 나에게 한국에서 뭐하고 있냐고 물어왔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하니, 산드라와 남편이 동시에 'Congratulation!'이라며 축하(?)해 주었다. 얼떨결에 축하를 받았지만 무언가 마음이 찝찝했다. 나도 산드라 남편에게 뭐하냐고 되물었더니 산드라 남편은 시에라리온의 미국 대사관에서 일한다고 말했다. 와우.. 천조국 정부 사람이 내일이 없는 백수를 축하해줬던 거였구나.. 마음이 더욱 무거워진 악숨행이었다.

 

버스를 이용하면 메켈레에서 악숨까지 7시간 정도 걸린다고 책에 나와있었으나, 우리는 그보다 2시간이나 빠른 5시간만에 악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악숨에 도착해서 드라이버에게 얼마를 줘야하냐고 물었더니 아무 돈이나 줘도 괜찮다고 한다. 응? 아마도 이 차량은 산드라 부부가 신청한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는 차량인가 보다. ETT와는 정말 커뮤니케이션이 안되는게 문제이기도 하지만 내가 이렇게 대책없이 여행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약 15달러에 상응하는 300비르를 쥐어줬다. 적당한 가격으로 편안하고 빠르게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숙소는 The Ark Hotel이라는 곳에 하루에 200비르씩으로 묵기로 했다. 처음에는 와이파이가 잘 됐는데, 오늘 밤부터 와이파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욕실 등이 켜지질 않았다. 나는 밤에 스마트폰 조명을 이용해서 샤워를 해야만 했다.

 

짐을 풀고 샤워와 빨래를 한 후 악숨 시내로 나와서 점심을 먹었다. 어느 호텔로 들어가서 tibs를 시켰다. 아디스 아바바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먹는 인제라(Injera)이다. 다나킬 투어 동안에는 파스타와 빵, 쌀밥 위주의 서양식만을 제공해줘서 에티오피아 전통음식을 먹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제라는 사진에서 바닥에 깔린 팬케잌 같은 음식으로 우리나라의 쌀밥과 비슷하게 어떤 음식을 시키든 인제라가 기본적으로 나온다고 한다. 단, 서양인이 주문하면 인제라를 원하는지, 빵을 원하는지 물어보는 경우도 있다. Tibs는 인제라 위에 있는 양고기를 작은 덩어리로 잘라 익힌 음식이다. 빨간 스파이시 가루를 따로 주길래 팍팍 뿌렸더니 옆에서 지켜보던 호텔 직원들이 기겁을 하고 그만 뿌리라고 만류했다. 맛을 보니 스파이시 가루가 맵긴 엄청 맵긴 했다. 하지만 매운 맛은 내 입맛에 딱 맞았다. 아마 에티오피아를 여행하는 동안에는 한국의 매운 맛은 그립지 않을 것 같다.

 

이제 배도 채웠겠다 악숨 시내를 구경할 차례다. 악숨은 과거 번영했던 악숨 왕국의 수도로 셀 수도 없이 많은 돌기둥(Stelae)과 시온 교회(St. Mary of Zion Churches), 그리고 각종 무덤들이 있는 곳이다.

역사: 악숨왕국은 로마 제국과 이집트, 인도 등을 상대로 상아, 금, 향신료 등의 무역을 중개하면서 번영하여, 가장 번영했을 당시에는 동로마제국과 페르시아 사이의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7세기 경부터 이슬람 국가들이 번성하면서 무역로가 끊겨 쇠퇴하기 시작하여, 10세기에 멸망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시바의 여왕 마케다가 악숨 출신인데, 마케다가 예루살렘의 솔로몬 왕을 방문하였을 때 가진 아들이 메넬리크 1세이다. 후에 메넬리크 1세는 예루살렘에 가서 언약의 궤를 가지고 귀국하였고, 이는 시온 교회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가이드 북을 보니 악숨 유적지 입장권 티켓 오피스는 돌기둥 유적지에 가기 전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나와있길래 찾아갔다. Tourist information center는 굉장히 좋은 건물 안에 있었다. 아마 악숨 시내에서 가장 좋은 건물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하지만 티켓은 유적지 앞에서 판매하기 때문에 나는 이곳에서 티켓을 살 수 없었다. 2009년 판 가이드 북에 너무 의존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분 정도 걸으니 드디어 돌기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금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보이는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돌기둥들이 쭉 산재해 있다. 그리고 이 돌기둥 밑에는 수많은 무덤들이 뭍혀있다고 한다.

이 지역에 도착하니 아이들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자기가 아티스트인데 자기가 만든 이 동전을 보란다.^^; 공부를 안해서 잘 모르지만, 악숨은 동전이 유명했었나보다. 티켓 오피스와 입구는 왼쪽으로 가면 있었다.

 

The Great Stele. 인간이 세운 것 중에 가장 높았던 것으로 알려진 돌기둥으로 높이가 무려 33m에 달한다. 이게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보다 컸다니.. 나는 이집트에 갔을 때 룩소르 신전의 오벨리스크를 보고 기겁을 했었는데, 이게 서있었다면 얼마나 위용이 대단했을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이건 2009년 판 가이드 북에는 없는 돌기둥인데 지금은 생긴 걸 보니 아마 1937년 무쏠리니가 약탈했다가 2005년에 되찾아 온 The Rome Stele인 것으로 추정된다.(순전히 내 생각) 가이드 북에는 유네스코가 이걸 다시 세우려고 하는데 수많은 무덤들이 땅 밑에서 발견되어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는 설명이 있었다. 아마 그 이후로 새로운 방법을 찾아 저렇게 아슬아슬한 형태로 세워놓았나보다. 빨리 확실히 세우고 옆에 지지대를 치우면 더 보기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돌기둥

 

돌기둥 밑에는 이런 무덤들이 있다.

 

돌기둥은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그들은 왜 이런 돌기둥을 세우는데 힘을 소비해야 했을까? 정말 궁금했다.

돌기둥 유적지 뒤쪽으로 박물관이 있는데 볼만했다.(공짜: 티켓에 입장료가 포함됨)

 

돌기둥을 둘러본 뒤 바로 옆에 있는 시온 교회에 갔다. 돌기둥 유적지의 티켓으로는 입장할 수 없어 별도의 입장료를 내야했다. 200비르. 무지무지 비싸다. 시온 교회는 4세기 경에 지어졌다는데, 아프리카 최초의 교회라고 한다. 사진은 그 시온 교회는 아니고 1960년 대에 새로 지어진 크고 아름다운 교회이다.

 

비싸니깐 다른 각도에서 한 번 더 찍었다. 그래도 성이 안차 360도 돌아가며 한 번씩 찍었다. 한 바퀴 돌면서 느꼈던 점은 아치들로만으로 위의 돔을 지탱하고 있는 형태가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와 매우 흡사한 구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시온 교회 내부 모습. 내부는 알록달록한 에티오피아 색감이 그대로 묻어나오게 꾸며져 있었다. 아기자기한 재밌는 그림들이 볼만했다.

 

이게 진짜 시온 교회의 모습이다. 바로 이 교회 안에 언약의 궤(the Ark of the Covenant)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언약의 궤는 선택 받은 단 한 사람만 접근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언약의 궤를 몰래 훔쳐봤던 사람들은 모두 불타 죽었다는 무시무시한 전설이 있어 나는 그것을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은 언약의 궤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기도 했다.

 

시온 교회 옆에는 작은 박물관이 있었다.(교회 티켓에 입장료 포함) 박물관에는 고대 언어가 새겨진 석판, 왕관, 십자가 등등 작지만 볼만한 것이 알차게 채워져 있었다. 박물관에 입장하기 전에 카메라는 사물함에 넣어두어야 해서 사진은 찍을 수 없었다.

 

돌기둥 뒤쪽으로 작은 교회가 있었다. 유럽의 교회와는 달리 지붕이 뾰족하지 않고 낮아 처음에는 절인줄 알았다. 내가 무식한건가..ㅠㅠ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그리 간절한지 열심히 기도 중이었다.

 

교회 뒤쪽으로도 쓰러진 돌기둥들이 즐비해 있었다. 악숨은 도시 곳곳에 이렇게 돌기둥 천지다. 설마 귀족이 한 사람 한 사람 죽을 때 마다 이런 돌기둥을 세웠던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돌기둥이 너무 많았다. (절레절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삼부사라는 음식을 사먹었다. 안에 감자 같은게 들었는데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다.

 

숙소 1층에는 바가 있는데 아직 내가 먹어보지 못한 맥주가 있어서 하나씩 사와서 마셨다. Dashen은 soso, Castel은 bad….

 

악숨 시내는 오늘 반나절 둘러본 것으로도 충분했던 것 같다. 정말 작은 도시다. 하지만 나는 내일까지 숙박하기로 했으니, 내일은 자전거를 빌려(뚝뚝이 기사들은 끝까지 자기 뚝뚝이를 타라고 하지만) 근교를 돌아다녀 볼 생각이다.

밤 12시가 되니 갑자기 길거리가 젊은이들 소리에 시끄러워졌다. 맞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다! 나도 나가서 놀까 하다가 맥주를 마셔서 피곤하기도 하고 해서 그만 하루를 정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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